퇴사와 이직 준비 시리즈 4/9
막연하게는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다.
하나님께서 다음 길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라는 믿음도 있고,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아무 의미 없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다. 회사 안에서 내가 맡았던 일도 있고, 실제로 줄인 시간과 만든 시스템도 있다.
그래서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력서를 열고, 경력기술서를 보고, 채용 플랫폼을 열고, 공고를 읽는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첫 순서가 잘 잡히지 않는다. 이력서를 먼저 고쳐야 하는지, 포트폴리오를 먼저 정리해야 하는지, 지원할 회사를 먼저 골라야 하는지, 아니면 내 포지션부터 다시 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잘 될 것 같다는 막연한 마음과, 오늘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이 같이 있다.
분명 회사 안에서는 의미 있던 일들이 있었다. 수작업을 줄였고, 운영팀의 시간을 줄였고, 여러 부서가 개발팀에 반복해서 요청하던 일을 직접 볼 수 있는 구조로 바꿨다.
숫자로 쓸 수 있는 결과도 있다.
정산 처리 시간은 4~5시간에서 30분으로 줄었다. 입점비 관리도 2시간에서 10분으로 줄었다. 광고 운영에서 거래명세서를 취합하고 전달하던 시간도 2시간에서 30분으로 줄었다.
그런데 이 경험들을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주변 이야기는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내 나이대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력서를 100개 넣어도 서류 통과가 쉽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물론 사람마다 상황은 다를 것이다. 지원하는 포지션도 다르고, 경력의 방향도 다르고, 회사가 원하는 조건도 다르다.
하지만 그 말이 주는 체감은 분명하다.
시장이 어렵다는 것.
예전처럼 경력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다음 자리가 열리는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
이 현실감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막연히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어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계속 다른 쪽을 보여준다.
그러면 "뭐부터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단순한 정리 문제가 아니게 된다.
이력서를 먼저 고칠지, 포트폴리오를 먼저 만들지, 지원 수를 늘릴지, 포지션을 좁힐지 하나하나가 더 급하게 느껴진다.
믿음이 없어서 현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예비하신다고 믿지만, 지금 시장이 좁고 경쟁이 치열하다는 사실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무작정 많이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반대로 너무 오래 준비만 하다가는 시장에 나가보지도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첫 순서가 필요했다.
회사 안에서는 맥락이 있었다
회사 안에서는 내가 한 일이 설명되지 않아도 어느 정도 통했다.
운영팀은 어떤 업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엑셀로 정산을 처리하던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카드 부분취소나 환불 예외가 왜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여러 콘솔을 오가며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거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 말에는 숫자보다 많은 맥락이 들어 있었다. 이전에 어떤 상태였는지, 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시스템이 생기고 무엇이 가벼워졌는지, 그 사람이 직접 겪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채용 시장에는 그 맥락이 없다.
이력서를 보는 사람은 내가 다녔던 회사의 상황을 모른다. 운영팀이 어떤 업무를 했는지도 모르고, 정산 예외가 얼마나 복잡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먼저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설명을 하려고 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힌다.
할 일은 많은데 순서가 없었다
처음에는 일단 떠오르는 대로 써봤다.
- 정산 자동화 시스템 구축
- 광고 운영 플랫폼 구축
- 통합 운영 콘솔 구축
- 운영 업무 자동화
-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환경 구축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너무 평평하다. 이 문장만 보면 무엇이 어려웠는지, 왜 필요했는지, 누구의 시간이 줄었는지, 어떤 판단을 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길게 쓰면 또 부담스럽다.
정산 시스템 하나를 설명하려고 해도 채널별 정산 룰, 입점비 자동이체, 카드 부분취소, 환불, 배송 이슈 같은 이야기가 줄줄이 나온다.
회사 안에서는 자연스러웠던 맥락이 이력서에서는 너무 길어진다.
짧게 쓰면 너무 단순해지고, 길게 쓰면 장황해진다.
그 사이에서 계속 멈춘다.
문제는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 이력서 문장 고치기
- 경력기술서 구조 다시 잡기
- 프로젝트별 숫자 정리하기
- 지원할 회사 고르기
- 포지션 방향 정하기
각각은 필요해 보였지만, 한꺼번에 보니 오히려 시작하기 어려웠다.
숫자를 정리하면 길이 보일 줄 알았다
그래서 숫자를 정리했다.
정산 처리 4~5시간에서 30분.
입점비 관리 2시간에서 10분.
카드 부분취소와 예외 검수 2~3시간에서 30분~1시간.
거래명세서 처리 2시간에서 30분.
ERP 등록 60분에서 10분.
숫자를 쓰면 조금 길이 보일 줄 알았다. 실제 결과가 있으니까. 과장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으니까.
그런데 숫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숫자는 결과를 보여주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바로 보여주지 않는다. 시간을 줄였다는 말만으로는 내가 문제를 어떻게 봤고 왜 그 순서로 만들었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 숫자를 쓰다 보면 이상하게 방어적인 마음도 생긴다.
정말 90%라고 써도 될까. 이 숫자를 어떻게 검증했는지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운영자 자기 측정이라고 하면 약해 보이지 않을까. 너무 좋아 보이는 숫자라 오히려 의심받지 않을까.
결국 숫자도 첫 순서를 정해주지는 못했다.
숫자는 재료였다.
하지만 재료가 많다고 바로 방향이 잡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회사에 어떤 경험을 먼저 보여줄지는 여전히 내가 정해야 했다.
내가 한 일과 함께한 일을 구분해야 했다
이력서를 쓰면서 가장 조심스러운 표현은 "주도", "총괄", "리딩" 같은 말이었다.
분명 내가 제품 정의와 개발을 강하게 맡은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단독으로 만든 시스템도 있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은 나 혼자 모든 것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
운영팀이 실제 업무 흐름을 알려줬고, 정산팀과 재무가 룰을 맞춰줬고, CS가 예외 패턴을 공유했고, 현업 담당자들이 검수하고 피드백을 줬다.
내가 한 일은 그 반복되는 시간을 보고, 시스템으로 옮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실제로 구현해서 운영에 안착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다 했다"처럼 보이는 문장은 불편했다.
그렇다고 너무 낮춰 쓰면 내가 한 판단이 사라진다.
혼자 한 일과 함께한 일, 내가 결정한 것과 함께 맞춘 것, 구현 오너십과 조직적 결과를 구분해야 했다. 이 구분이 어렵지만, 이력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막막한 이유는 자신감이 없어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내가 자신감이 없어서 막막한 줄 알았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내 안에는 "그래도 잘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겠지, 내가 해온 시간이 다음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든 쓰이겠지 하는 마음이 있다.
다만 지금은 선택지가 너무 흩어져 있다.
내가 개발자인지, 개발 리더인지, 운영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인지, 혹은 조직의 반복 비용을 줄이는 문제 해결자인지 아직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력서를 열면 내가 작아진다기보다, 내가 어디서부터 설명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느낌이 든다.
6년 넘게 버틴 시간.
운영팀의 답답함을 들으며 하나씩 시스템으로 옮겼던 시간.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버텼던 시간.
이 모든 것을 몇 줄 안에 넣을 수는 없다.
이력서는 내 경력 전체를 증명하는 문서가 아니다. 채용 시장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가 어떤 문제를 반복해서 풀어온 사람인지 보여주는 압축 문서에 가깝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정리가 된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나를 크게 보이게 만드는 것도, 작게 낮추는 것도 아니다. 긴 시간을 어떤 순서로 압축할지 정하는 것이다.
모든 맥락을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어떤 맥락을 먼저 보여줄지는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어떤 문제를 반복해서 풀어왔나
지금까지 정리해보면 내 경력의 중심에는 비슷한 패턴이 있었다.
사람이 버티던 반복 업무를 찾고, 그 업무가 왜 힘든지 현업의 언어로 듣는다. 수작업 구간을 단계별로 쪼개고, 시스템이 대신할 수 있는 것과 사람이 판단해야 하는 것을 나눈다. 결과는 시간, 오류, 동선, 의존도 같은 지표로 확인한다.
이렇게 쓰면 조금 보인다.
나는 단순히 관리자 페이지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운영 비용과 반복 업무를 시스템으로 줄이는 일을 해온 사람에 가깝다.
그 문장이 아직 완벽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정산 자동화 시스템 구축"보다는 내 경력에 가까운 말 같다.
그래서 첫 번째 할 일은 방향을 정하는 것 같다
지금 당장 모든 문장을 완성하려고 하면 또 막힐 것 같다.
그래서 먼저 방향을 정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읽히고 싶은가. 어떤 문제를 반복해서 풀어온 사람인가. 어떤 회사에서 내 경험이 가장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력서 문장만 고치면, 계속 표현만 바꾸게 될 것 같다. "구축"을 "개선"으로 바꾸고, "주도"를 "리딩"으로 바꾸고, 숫자를 앞에 놓았다가 뒤에 놓는 식으로만 맴돌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막막함은 게으름이나 무능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첫 순서를 아직 못 잡은 것이다.
잘 될 것 같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막연한 위로로만 두지 말고 오늘의 첫 순서로 내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이 있다고 믿는다면, 나도 그 방향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경험을 정리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도 과장하지 않고 설명하고 싶다
이력서를 쓰다 보면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더 명확하게 보이고 싶고, 더 설득력 있게 보이고 싶다. 반대로 자신감이 떨어지는 날에는 내가 한 일까지 필요 이상으로 낮춰 보게 된다.
둘 다 조심해야 할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내 일을 다시 설명한다면, 과장도 축소도 아닌 쪽으로 가고 싶다. 내가 한 일은 내가 한 일로 말하고, 함께한 일은 함께한 일로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이력서는 나를 크게 보이게 만드는 문서도 아니고, 나를 작게 만드는 문서도 아니었으면 한다.
내가 맡았던 자리에서 어떤 문제를 보고, 어떤 책임을 감당했고,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 정직하게 압축하는 문서였으면 한다.
아직 이력서를 열면 막막하다.
그래도 이제는 그 마음을 조금 다르게 보려고 한다.
내가 부족해서 멈춘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어떤 순서로 설명할지 정하는 과정이 어려운 것이라고.
그리고 그 어려운 압축의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문장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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